2014년 12월 6일 토요일

미생을 드라마로 보고

만화로 전권을 다 사서 가지고 있는 미생을 최근에 드라마로 다시 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한국에서 근무했던 회사는 상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업무 내용을 가지고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오랜만에 다시 보는 한국식 조직문화가 그리 낯설지는 않다. 수직적인 조직내 인간 관계와 단단하지만 유연하지 못한 시스템 속에서, 윗사람이 스스로 내려오기 전에는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어려운 그런 분위기는 한국 대기업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생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팀이 보통 한국 직장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울 만큼 멋진 곳이었다는거다. 담당 중역-부서장-팀장-선임들-나-후임들로 구성된 가스선 기본설계 기본반이라는 조직이, 그야말로 아주 따뜻하고 합리적인 곳이었다. 조직의 가장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관료주의와 직급이 높더라도 딱히 넓어지지 않는 운신의 폭 속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스스로를 낮추어서 후임들이 일하기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고 그 안에서 나도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다. 그 팀으로 옮길 때는 프로젝트때문에 대리급이 1:1 트레이드 되어서 내가 옮긴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가기 싫다고 버티다가 옮기고 나서는 나의 약한 고집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고등학교/대학교 동창들과도 딱히 이메일로 안부를 묻거나 하지 않지만 (물론 페이스북과 카톡으로 다들 연결은 되어있음), 몇 달에 한 번은 내가 있었던 그 팀에 연락을 하고 안부도 묻곤 한다. 그만큼이나 모든 팀원들에게 고마웠고, 또 개인적인 욕심으로 유학을 위해 퇴사를 하면서도 혹시나 나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업무적으로 힘들어지거나 관리자의 고과에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걱정도 많이 했다. 마지막에 연락을 했을 때는 근 몇년 사이에 LNG / LPG 수요가 많아져서 가스선 수주가 늘어나 많이 바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기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미생의 나오는 여느 팀들처럼 조직 내에서 직급을 깡패처럼 이용하는 문화 자체가 없지만, 그렇다고 팀장이 주말에 특근하는 직원들 생각해서 빵을 준비해온다거나, 혹은 가끔씩 집에 팀원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는 일도 많지 않다. 물론 한국에서도 그런 팀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로또였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오죽하면 영업 3팀 같은 조직이 드라마에 나오겠나. 지금 직장생활이 행복하고 스스로 다시 돌이켜봐도 같은 선택을 했을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현중 기본설계 2부에 있었던 당시의 추억은 길지 않은 경력 속에서 여전히 한번씩 회상하고 마음에 온기를 얻을 수 있는 값진 보물이다.

다시 미생으로 돌아와서 개인적으로 만화와 드라마 모두 나름의 구성을 잘 살려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면서도 조금씩 살을 붙여서 미리 원작을 본 사람도 몰입할 수 있도록 내용을 재구성했고, 원작 만화는 만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속도감과 그림으로 표출되었을 때 더 간결하고 깊은 내용이 전달되는 이점을 충분히 살렸다. 한국 조직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든 한 때 했던 사람이든 본인을 등장인물에 투영해서 작품에 푹 빠지도록 만드는 매력은 원작이나 드라마나 비슷한 듯. 아래 그림은 원작 만화의 인물들, 왼쪽부터 장그래, 한석률, 장백기, 안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