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1일 토요일

운과 노력

2005년도부터 시작되어 금융위기 이전까지 이어진 조선 시장의 소위 '슈퍼 사이클'은 국내 메이저 조선소의 자산 규모 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서 조선 산업이 자리잡았던 위상을 매우 단기간에 몇 단계씩 끌어올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2004년에 입사했던 내가 기억하던 현대중공업의 주식은 코스닥에서도 보기 힘든 폭발적인 상승과 랠리를 이어갔고, 채용에서도 내가 입사했던 해에 뽑은 인력의 몇 배나 되는 인력을 매년 뽑아댔다. 전국의 조선해양 전공자들 (수도권이든 지방이든, 본교든 캠퍼스든 상관없었다) 은 갑자기 메이저 3사 를 골라서 갈 수 있었고, 그렇게 있는 전공자를 족족 뽑아도 조선 관련 인력이 부족해서 뒤늦게 많은 대학교들이 조선관련 학과를 부설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여기에 조선소마다 인력 유치를 위해 초봉을 대폭 끌어올리는 바람에 대졸 신입사원의 초봉이 5,000만원에 육박했다. 회사의 인기가 더욱 치솟으면서 급기야 원래 조선소에 관심을 안가지던 타과 전공자들까지 몰리기 시작했고, 입사 경쟁률은 입에 담기도 민망한 숫자에 이르렀다.

2007년, 지방의 조선소에서는 별 관심 없던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세계 선주들의 돈주머니를 사정없이 털어냈고, "만들라고 발주는 했지만 줄 돈은 없다"는, 그야말로 무슨 정치인이 청문회에서나 뱉을 법한 수준의 황당한 코멘트가 조선소에 속속들이 도착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전공이 조선이면 학교도 안보고 뽑는, 온세상이 행복할 것 같은 상황이 급변해서 이제는 당신이 최고의 학교에서 정확하게 조선소와 맞는 전공에서 1등으로 졸업해도 취업의 기회가 없다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경기를 뒤흔드는 큰 파도앞에서 개인의 노력이 허무하게 쓸려가는 현실을 보면서, 내가 원래 싫어했던 '운친기삼'같은 소리가 허튼소리가 아니었음을 온몸으로 깨달았고, 또 그렇게 단순히 졸업시기 차이때문에 승선 기회를 놓친 우수한 친구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난 우수하지도 않았고 졸업도 그냥 생각없이 했거든

2013년 봄, 그러니까 강산이 조금 바뀔만큼 시간이 지나서 다시 구직을 해야하는 상황이 찾아왔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다시 기가 막히게 슈퍼 사이클의 막차에 올라탔다. 실력이 별루라 운이라도 좋았던 걸까.. 졸업 반년 전부터 지원도 안한 회사에서 인터뷰를 보자고 전화가 오고, 심지어는 전화상으로 연봉과 베네핏을 제시하면서 당장 일할 수 없겠냐는 곳도 있었다. 이름없는 작은 회사도 아니고, 정말 굵직한 회사들이 그러는 상황이었다. 졸업 시점에 테이블에 오퍼 5개를 놓고 선택을 했고, 원래 이바닥이 다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에 몇몇 주변 지인들에게도 나처럼 유학 오는게 어떠냐고 권유하곤 했었다. 정말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다행히 내가 권유해서 온 사람은 없었지만, 만약에 지인이 내 말을 듣고 2013년부터 유학을 준비해서 이곳으로 왔으면 지금쯤 내 멱살을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유가가 뚝 떨어지면서 잡마켓이 얼어붙는 현실 한가운데에서 주변을 살펴보면, 왜 Oil & Gas 분야의 연봉이 타 분야에 비해서 높은지 이해도 된다. 뭐 그런다고 그 연봉을 잘 쪼개서 불황때 버틸만큼 따로 모아놓는 사람이 있을거라고는 생각 안하지만. 결국 High Risk, High Profit 이라는 거다. 아무튼 하루하루 긴장되는 직장 생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안정적이었던 예전 한국생활로 돌아가고 싶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그렇지는 않다" 다. 단지 예전에 철없던 시절에, 내가 쌓은 경력과 미국에서 조금 더 공부한 지식이면 나 하나쯤 취업할 회사가 없겠냐라는 식의 위험천만한 생각은 좀 아니었다는 거다. 운이 좋았다는 말도 지금은 수긍하고, 무엇보다 주변에서 나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15년 3월 16일 월요일

저유가 시대의 휴스턴

고공 행진을 하던 유가가 날개없는 하락을 계속하는 동안, 휴스턴의 Oil & Gas 관련 회사들은 그야말로 재앙에 가까운 시간을 겪고 있다. 당장 채산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전/가스전을 개발하려던 프로젝트는 취소되거나 운이 좋아봐야 연기되었고, 스케쥴에 맞춰서 엔지니어링을 수행하려고 뽑았던 고급 인력들은 고스란히 오버헤드 코스트가 되어 회사의 경영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럴 때마나 한 번씩 나오는 '위기는 곧 기회다' 같은 캐치프레이즈는 역설적으로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가 진짜 휘청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잘 묘사해준다. 원유 가격처럼 투기의 대상이 되기 쉬운 아이템은 오를 때는 수요/공급의 균형점 이상으로 오르면서, 내릴 때는 정말 바닥이 보이지 않고 바닥에 내려와도 언제 반동을 할 지 예측이 어렵다. 그렇게 더 많은 불확실성이 더해진 원유 가격이 떨어질 때면, 필요 이상의 수요에 베팅을 했던 투기세력  투자자들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개발을 담당하는 엔지니어링/구매/건조 인력들이 일거리를 잃거나, 심하면 직업을 잃기도 한다.

큰 그림 안에서 사이클을 보면, 유가가 조금씩 오를 때 지속되던 투자가 잘 굴러가면서 어느 시점부터는 투자를 넘어서 투기 수준의 돈이 Oil & Gas 에 흘러들어오는데, 사업자들은 이걸 조심스럽게 흘려버리는 게 아니고 오히려 투기조차도 레버리지 삼아서 필드 개발을 하려고 용감한 계획을 짜고, 시행자들은 짜여진 계획의 수행을 위해서 인력을 끌어모으는 거다. 어차피 모멘텀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에 거품은 꺼지는 법. 한국의 부동산 투기 욕할 거 없다. 여기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투기의 현장이다.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같은 고통의 시간이 그야말로 한밤의 도적같이 찾아 온다.

문제는 항상 그렇듯이 막차를 탄 사람들이 대체로 가장 큰 짐을 지게 된다는 거다. 쉐일 가스 사업에 뛰어든 중소기업들이나, 해양 및 해저 개발로 영역을 녋힌 Onshore 회사들, 그리고 과감한 M&A 를 통해서 지갑이 빠듯해진 기업들에게 지금같은 시기는 기회는 커녕 진정 어마어마한 위기다. 더불어 그 회사에 고용되어 있는 많은 직장인들도, 엄한 배를 타고 가다가 빙산 만난 격이 되어 본인 능력으로는 어찌 해볼 수가 없는 고용 불안을 겪게 된다.

영주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많은 직장인들에게 지금같은 시기는, 정말 넘기가 힘든 심리적인 보릿고개다. 다른 때 같으면 연말 보너스가 짜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도 지금같으면 오늘 하루 고용이 연장된 것으로 감사하게 된다. 인터넷의 Oil & Gas 관련 웹사이트 및 기사거리들은 이미 연초부터 어디가 얼마나 해고했다더라 하면서 연일 떠들어대고, 당장 회사에서도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이 줄어드는게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딱 무장 해제하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 있는 기분이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면, 지금이 시중에 품질 좋은 인력들이 대거 나와있는 시기인 것도 맞다. 특히나 Dr. Michio Kaku 가 토론회에서 대중에게 "US secret weapon", "Genius visa" 로 소개했던 취업비자(H1b visa) 지원자 내지는 취업비자를 소지한 구직자를 찾는게 지금처럼 쉬운 시기는 근래에 별로 없었을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구직을 못했든, 혹은 이전 직장에서 해고를 통해서 나왔든, 직장을 찾으며 상대적으로 낮은 연봉도 어쩔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마다하지 않는 고급 인력들이 물반 고기반으로 마켓에 나와있는 시대. 그것이 지금, 2015년 3월 휴스턴 Oil & Gas 산업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