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도부터 시작되어 금융위기 이전까지 이어진 조선 시장의 소위 '슈퍼 사이클'은 국내 메이저 조선소의 자산 규모 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서 조선 산업이 자리잡았던 위상을 매우 단기간에 몇 단계씩 끌어올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2004년에 입사했던 내가 기억하던 현대중공업의 주식은 코스닥에서도 보기 힘든 폭발적인 상승과 랠리를 이어갔고, 채용에서도 내가 입사했던 해에 뽑은 인력의 몇 배나 되는 인력을 매년 뽑아댔다. 전국의 조선해양 전공자들 (수도권이든 지방이든, 본교든 캠퍼스든 상관없었다) 은 갑자기 메이저 3사 를 골라서 갈 수 있었고, 그렇게 있는 전공자를 족족 뽑아도 조선 관련 인력이 부족해서 뒤늦게 많은 대학교들이 조선관련 학과를 부설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여기에 조선소마다 인력 유치를 위해 초봉을 대폭 끌어올리는 바람에 대졸 신입사원의 초봉이 5,000만원에 육박했다. 회사의 인기가 더욱 치솟으면서 급기야 원래 조선소에 관심을 안가지던 타과 전공자들까지 몰리기 시작했고, 입사 경쟁률은 입에 담기도 민망한 숫자에 이르렀다.
2007년, 지방의 조선소에서는 별 관심 없던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세계 선주들의 돈주머니를 사정없이 털어냈고, "만들라고 발주는 했지만 줄 돈은 없다"는, 그야말로 무슨 정치인이 청문회에서나 뱉을 법한 수준의 황당한 코멘트가 조선소에 속속들이 도착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전공이 조선이면 학교도 안보고 뽑는, 온세상이 행복할 것 같은 상황이 급변해서 이제는 당신이 최고의 학교에서 정확하게 조선소와 맞는 전공에서 1등으로 졸업해도 취업의 기회가 없다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경기를 뒤흔드는 큰 파도앞에서 개인의 노력이 허무하게 쓸려가는 현실을 보면서, 내가 원래 싫어했던 '운친기삼'같은 소리가 허튼소리가 아니었음을 온몸으로 깨달았고, 또 그렇게 단순히 졸업시기 차이때문에 승선 기회를 놓친 우수한 친구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난 우수하지도 않았고 졸업도 그냥 생각없이 했거든
2013년 봄, 그러니까 강산이 조금 바뀔만큼 시간이 지나서 다시 구직을 해야하는 상황이 찾아왔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다시 기가 막히게 슈퍼 사이클의 막차에 올라탔다. 실력이 별루라 운이라도 좋았던 걸까.. 졸업 반년 전부터 지원도 안한 회사에서 인터뷰를 보자고 전화가 오고, 심지어는 전화상으로 연봉과 베네핏을 제시하면서 당장 일할 수 없겠냐는 곳도 있었다. 이름없는 작은 회사도 아니고, 정말 굵직한 회사들이 그러는 상황이었다. 졸업 시점에 테이블에 오퍼 5개를 놓고 선택을 했고, 원래 이바닥이 다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에 몇몇 주변 지인들에게도 나처럼 유학 오는게 어떠냐고 권유하곤 했었다. 정말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다행히 내가 권유해서 온 사람은 없었지만, 만약에 지인이 내 말을 듣고 2013년부터 유학을 준비해서 이곳으로 왔으면 지금쯤 내 멱살을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유가가 뚝 떨어지면서 잡마켓이 얼어붙는 현실 한가운데에서 주변을 살펴보면, 왜 Oil & Gas 분야의 연봉이 타 분야에 비해서 높은지 이해도 된다. 뭐 그런다고 그 연봉을 잘 쪼개서 불황때 버틸만큼 따로 모아놓는 사람이 있을거라고는 생각 안하지만. 결국 High Risk, High Profit 이라는 거다. 아무튼 하루하루 긴장되는 직장 생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안정적이었던 예전 한국생활로 돌아가고 싶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그렇지는 않다" 다. 단지 예전에 철없던 시절에, 내가 쌓은 경력과 미국에서 조금 더 공부한 지식이면 나 하나쯤 취업할 회사가 없겠냐라는 식의 위험천만한 생각은 좀 아니었다는 거다. 운이 좋았다는 말도 지금은 수긍하고, 무엇보다 주변에서 나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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